안티 크리스트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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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크리스트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여러분들은 시시한 것을 시시하다고 분명히 경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미적지근함을 거부하며 살아야 한다.
'선'이란 권력의 감정과 권력에 대한 의지 그리고 권력 자체를 인간에게 오도록
증대시키는 모든 것이다.
그것은 힘이 더 세진 느낌이고 싸워 이긴 느낌이며 어떠한 정점에 도달한 느낌이다.
나약한 인간이나 못난 인간은 세상에서 도태되어야 한다.
무익한 인간을 동정하면 안 된다.
'악' 그 자체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마음 약한 인간과 품성이 용렬한 인간 그리고 못난 인간들의 편을 들어왔다.
파스칼이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는 크리스트교의
'원죄설'을 믿고 말았다. 크리스트교의 설명을 빌리자면
'원죄'란 '인간이 태어나면서 지은 죄'라고 한다.
'원죄'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애초부터 그런 말은 믿지 말았어야 하는데 말이다. 파스칼의 이성은 '원죄'가 아니라
크리스트교에 의해 부패했다.
인간은 힘을 상실하고 만다. 자연도태라는 말이 있다.
자연 세계에서 약한 생물은 살아 남을 수 없다. 강한 종의 생물만이 살아남음으로써
그 종은 강해진다. 동정은 그런 자연의 법칙을 위반하는 행위다.
못난 인간에게 동정을 하니 말이다.
'동정'은 인간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도구다.
칸트는 철학계의 스타가 되었지만, 나는 그가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크리스트교의 신학자로서 성공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이란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낸 산물이다.
칸트처럼 단순하게 '도덕을 중요시하자'는
생각은 백해무익하다. 보편적인 '도덕','의무','선' 따위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칸트의 개념과 자연계의 법칙은 전혀 다르다.
칸트라는 사람은 정말 질 나쁜 범죄자다.
인간은 동물이다'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동물이다.
왜냐하면 가장 교활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정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신이란 무척 애매모호하다.
완전한 것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육체와 신경조직, 쾌락 등을
모조리 빼버리면 정신은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크리스트교의 문제점을 정리해보자. 첫 번째, '신', '영혼', '자아', '정신',
자유의지'와 같이 있지도 않은 것에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언어를 부여한 점.
두 번째, '죄', '구원', '신의 은총', '벌', '죄의 사함'과 같은 공상적인 이야기를
꾸며낸 점. 세 번째, '신', '영','영혼' 등
다섯 번째, '회개', '양심의 가책', '악마의 유혹','최후의 심판'과 같은
연극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현실로 끌어들여 심리학을 왜곡한 점.
현실은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도피했을 뿐이다.
크리스트교의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신'에서 '크리스트교의 신'으로, '
민족 신'에서 '선 그 자체'로 신이 변한 것을 진보라고 생각한다.
정말 우둔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켜주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존재다.
불교는 크리스트교에 비해 굉장히 현실적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탄생했을 때 '
신'이라는 개념은 이미 초월한 상태였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불교는 크리스트교처럼 "죄와 맞서 싸우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현실을 제대로 보고 "고통에 맞서 싸우자"고 주장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석가는 '이기주의는 인간의 의무다'고 설파했다.
안타깝게도 유럽은 아직 불교를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않다.
불교에서는 고통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고통스럽다"고 솔직히 말하기 때문이다.
'진리'와 '진리일 것이라는 믿음'은 전혀 다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성하려들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크리스천은 자신들이 유대교의 마지막 모습인 줄 모르고
우리는 반 유대다"라고 하니, 그들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편리한 대로 신을 이용했다.
"예수는 다른 이들을 위해 죽었다"라는 말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십자가에도 분명 아니라고 씌어 있다.
크리스트 교회가 자신들을 선전하는 데 편리하도록 예수를 계속해서 변화시켰다. '
신앙이란 보이는 대로 보지 않는 것'이다. 예수가 인도에서 태어났다면
인도 철학을 했을지도 모르고,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노자의 가르침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예수와 크리스트교는 무관하다. 예수에게 있어 '신앙으로 인해 받을 수 있는
행복'이란 약속이 아니라 좀더 현실적인 것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
언젠가 머지않아 찾아올 '신의 나라',
실은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교회는 크리스트교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암피트리온 이야기를
이용하여 결국은 '성모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잉태했다'고 꾸며댔다.
처녀는 임신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여기까지 발췌 ,,,,개독박멸 !!!
개독교박멸 !!!
댓글목록

사람답게님의 댓글
냉철한 비판이 돋보이는 내용이지요.^^
독일은 2차 세계 대전 패전후,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에 종교세를 걷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 종교세가 개독교를 없애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대성공이라고 봐야 할 듯...^^)
니체의 글 중에서, "불교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유일하게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종교"라는 말에는 동의 합니다만,...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의 특징은
개독이나, 불자나 비슷한 경우가 많아서 "논리를 던져버린 불자들"이 너무 많기에,
쉽사리 와 닿는다고 하기는 어렵군요.
부처가 강조한, 불교의 기본 생활 "탁발"이 없어진 이유를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스님들 역시, "먹사들"의 주장과 같은 주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입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스님에게 공양하는것이 곧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목사=신, 중=부처라는 식의 주장)" 이라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부처가 탁발(아주 쉽게 말해, 밥을 얻어 먹는것..)을 강조한 이유 조차 따지지 않고,
스님을 삶의 구원자라고 생각하여, 무작정 매달리려는 게으름은 과연 불교적인지 논리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듯 합니다.
하기사, 본인이 마주한 개독치고 바이블을 아는 자 드물고,
불자치고 불경을 제대로 아는자가 없더군요.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한 종교"라는 것은,
종교적 이상향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만, 교리라도 논리적(개독보다는...)이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걸까요..



사람답게님의 댓글
다음은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것들입니다.
1. 살아서, 악행을 거듭한 목련존자의 어머니는 지옥에 갔다고 합니다.
2. 살아서 악행을 하면, 그 업보때문에 다음 생 에서 그에 따른 고생을 한다고 합니다.(윤회설, 업보)
3. 티벳 불교에서는 이승과 저승(지옥과는 다름)이 있어 죽은자를 위한 지침서(사자의 서)를 읽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느것이 논리적일까요..??
이것들을 모아서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스님들, 불자들은
그저, "살아서 타인에게 악행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얼버무리고 말지요.
제대로 된 불교의 가르침(부처의 가르침)은 이런것들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즉, "무일물"과 "일체유심조"만이 불교의 핵심이라고 할 것인데,
불교에도 이미 많은 종파와 분파가 있는것은,
종교라는 것의 본질은
그 자체가 분열이며, 인간 욕심의 산물이라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출가(정식으로 중이 되면..)를 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머리를 깎는 것 이지요.
머리를 깎고나면, "발우(쉽게 말해 밥그릇 세트)"를 받게 됩니다.
탁발을 할 때에도, 이 발우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즉, 탁발은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삶만을 영위하겠다는 불교적 신념의 시작입니다.
(부처가 득도를 한 직후, 처음 공양을 받을때 사천왕들이 부처에게 준 밥그릇이 발우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불교를 보면, 식사를 할 때, 발우를 사용하는 스님은 거의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삶만 영위하겠노라는 신념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오히려, 발우에 가치를 주는 경우가 흔합니다.
(어느 스님의 소유였던 발우는 산화철로 만들어져서 귀하다던가... 가격이 얼마나 한다던가...)
무엇이 논리적 불교교리인지, 과연 불자들은 제대로 알고나 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