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치유에 대해 고찰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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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마가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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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까지 사람들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각각 사용하고 있는 동사가 3인칭 복수형이므로
본래는 그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가는 편집 구절인 6절에서 그것을 바리새인들이라고 구분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가가 의도적으로
바리새인이라고 편집했기 때문이다.
1~5절은 예수가 안식일에도 굳이 병자를 치료했다고 하는 민간전승이었다.
안식일에 병을 치료하는 것까지 금지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당시의 유대교의 교리였는지는 의문이다.
출애굽기에 대해서 당시의 주해(註解)인 메키르타라는 문서에는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안식일을 밀어낸다는
표현이 있다고 하며,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누가 14;5>
라는 표현은 당시의 랍비 문헌 속에도 보인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모두 이 구절이 말하는 것처럼, 모두가 마음이 굳어져 있었다고 하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다.
전승에는 특별히 바리새인이라고 돼있지 않았지만, 일부러 바리새인이 좁고 완고하다고 변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마가는 그 같은 완고한 태도가 바리새인의 전형적인 태도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단정은 그리스도교도의 편견과 악의에 찬 자세라는 유대인들의 호소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판단이 바른지 어떤지 보다, 이런 문제를 매개로 해서 나타난 예수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이야기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라는
예수의 단호한 선언 직후에 말한 것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에는 이미 안식일 그 자체를 넘어서는 방향을 시사하고 있다. 이 구절도 그 방향의 재확인이다.
예수가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예수가 안식일에 치유행위를 하는지 어떤지를 보고, 고발하려는 사람들이 예수의 언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주시하고 라는 그리스어에는 악의를 가지고 엿본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인간의 마음이 비틀려 있을 때, 얼 만큼 으스스한 일이 일어날까?
여기에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이용한다는 빈약한 심정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한쪽 손 마른 사람은 이미 두말할 것 없이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여러 가지 차별이나 소외를 경험해 왔을 것이다.
그는 심인성 기능장애로 고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사람은 그러한 단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절실히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나타내는 곳에, 굳이 계속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이 사람의 절실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는 커다란 기대를 품고 예수를 응시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으스스하고 살벌한 상황 속에서, 예수는 이 사람에게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고 한다.
그리고 예수는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고 힐문한다.
이 예수의 질문에서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의 치유가 합법적인가 아닌가라는 당면의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
명백히 예수는 이 사람의 치유라는 개별의 문제에 사건을 한정하지 않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려고 하고 있다.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이라는 강렬한 질문을 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할 것인가 악을 행할 것인가의
양자택일을 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이렇게 까지 객관화해서 질문을 받는다면 상대는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침묵은 설득 당해서 스스로 납득하는 침묵이 아니다. 이런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면 목숨과 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런 대답을 했다면 치유가 선이나 목숨으로 연결되는가라고 추궁당할 것이다.
따라서 이 침묵은 그런 불리한 상황에 서게 됐을 때를 대비한 분만(憤懣)이나 울분을 속에 담은 침묵이다.
예수가 이렇게 철저히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태도에는 안식일에 치료가 허용되느냐의 여부를 넘어,
안식일이든 아니든 선을 행해서 목숨을 구하는 일이 당연하다는 태도라는 것이다.
즉 예수가 율법 그 자체를 폐기한다는 것을 마가는 의도적으로 창작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마가의 의도로써는 <2;27, 2;28> 의 선언을 근거로 하면 그런 방향을 예수가 선언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가가 6절을 가필할 이유가 없다.
즉 바리새인들이 평상시에는 적인 헤롯당과 상의해서 예수를 죽이려한다는 말을 할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의 자못 음험한 태도를 보자, 노해서 그들을 둘러보고,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면서
손 마른 사람에게 말했다. 손을 내 밀라고. 예수가 노하심으로 라고 쓰인 곳은 신약 속에서 여기뿐이다.
여기에 부드러운 예수의 이미지는 티끌만큼도 없다.
일찍이 어느 마르크스주의자가 그리스도교도에 대해서 한 말이 생각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교도를 믿을 수 없다. 왜냐면 그들은 화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불성실하기 때문이다” 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예수의 이미지대로 라면 기독교에는 화를 낸다는 것이 뭔가 ‘상스럽다’, ‘창피하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완전히 노여움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냥 노여움을 표현하면 ‘사랑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런 자세는 위선적인 태도를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
화를 내야할 때 화를 내지 않고, 마지못해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얼굴이 조여지며
위선의 늪에 빠지는 것이다.
신약 속에서 단 한번이라 해도, 이 부분에서 예수가 ‘노하심으로 둘러보시다’고 한 것을 기독교인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마가의 의도대로 말하자면 이 손 마른 사람은 예수의 이런 모습을 접하고 감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와 교통하는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손을 내밀라는 예수의 명령을 기꺼이 신뢰를 가지고 들었을 것이고, 솔직하게 두려움 없이 그를 따르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손을 내밀었고 치유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서의 같은 구절을 보면 마가에게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던 ‘예수의 노여움’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마태 12;9~14>
마태는 신의 아들인 예수가 화를 낸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병을 치료하는 것이 옳은가 라고 자못 율법 상의 질문을 예수에게 향하는 것으로 바꿔 쓰고 있다.
그에 대해 예수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예수의 치료행위가 율법에 어긋나지 않다고 말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래서는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누가서의 같은 구절에서도 역시 예수가 화냈다는 부분이 삭제되어 있다.<6;6~11>
무엇보다 마가서의 그 양자택일 같은 질문은 남아있지만. 누가는 이 치유의 얘기와 비슷한 다른 얘기를 기록하고 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14;1~6>
여기서는 수종병 환자가 치료받는다.
마지막에 예수가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라고 한다.
그러면 예수의 행위가 율법에 위반되지 않는 정도의 얘기가 되고, 결국은 긍휼의 얘기가 돼버린다.
마태나 누가 모두 마가서를 보고 썼다지만, 제멋대로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되고
예수를 완벽한 존재로 만들려는 생각에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ps:가능한 바이블을 왜곡하지 않고 쓰인 그대로 가져오기 때문에, 간혹 안티들에게는 의아한 표현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원칙이므로 양해바랍니다.
댓글목록


chamchi님의 댓글
교인들이 화내는 걸 나쁜 걸로 간주해서 화를 숨기려고 하고 화 안난 척하는 모습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작게는 사적인 대화에서, 누구 뒷담화를 하는데 이해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고 합니다.
누가 봐도 화날 만한 일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말이죠. 듣는 제가 더 열받아하고 화를 냅니다. 근데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니까 답답한 거죠. 시원하게 화도 못 내고 욕도 못 할 바엔 뭐하러 뒷담화 합니까?
또 크게는 불의한 일들, 이 세상의 큰 참사들, 그 뒤에 숨어있는 개색퀴들에 대해서도 도대체 분노를 표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를 표현하는 이에게 '가만히 있으라' 고 하죠.
스테판 에셀은 93세에도 우리에게 "분노하라!" 고 쩌렁쩌렁하게 외친 판에 말이죠.
그는 분노할 줄 아는 능력을 인간의 구성요소라고 했습니다. 화내지 않고 가면이나 써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잖아요.
화 안 난 척 하는 교인들에게, 그러다 병 생긴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뫼르소님의 댓글
뫼르소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마태와 누가서에 화가났다는 단어가 없다고 해서 저자들이 의도적으로 예수의 분노를 삭제했다고 보는 것은 마태와 누가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밖에 말할 수 밖에 없군.
중요한 것은 단어 하나가 아니라 (어차피 자필 원본이 지구상에 없는 이상) 글의 분위기와 맥락이지. 마태와 누가서를 보면 사람에 따라 분위기가 화를 내었다고 볼 수도 있고 또는 화를 내더라도 거룩한 화를, 또는 한탄하는 장면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지.
다음 예를 한 번 들어 보자구!
"똥싸!"
"똥싸!"
"똥싸!"
글쓴이가 어떤 맥락과 분위기에서 썼는지는 당사자만 알수 있지. 굳이 알려면 전후맥락을 살펴 보면서 가늠할 수 밖에.
똥싸냐고 묻는 것일수도 있고 똥싸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계속 똥을 잘싸라는 뜻일 수도 있으니까.
근데 좀 안쓰럽긴 해. 별로 문제같지 않은 지엽적인 것을 문제로 제기하니까.



뫼르소님의 댓글
뫼르소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과연 유병언과 청해진과 이준석 선장 그리고 관련화된 사회에만 있을까.
난 그것이 돈을 향한 인간의 본성 다른 말로 하면 땅에 연연한 인간의 본성과 탐욕이라고 생각해. 물론 참사와 관련된 당사자들은 응분의 댓가와 심판을 받아야지. 그래야 사회와 국가가 존립하는 이유가 설명 되니까. 하지만 성경과 그리스도교인은 그 이면과 뿌리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
만일 부조리한 이면을 캐면 캘수록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이 부조리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이지. 내가 오늘 인터넷에서 날린 댓글 하나가 상대방의 본성을 자극하여 다른 사람에게 비극적인 살인을 하게 된다는 등 말이지.
그런 면에서 성경은 인간은 어찌보면 누구나가 가해자일 뿐, 피해자 일 수는 없다는 무서운 진실을 말하고 있지.
바울서신에서 분노를 자제하고 서로 화평하라는 그런 관점에서 나왔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어.






뫼르소님의 댓글
뫼르소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셰프토피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증명할 수 없는 신은 신이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정작 증명가능한 신을 제시하면 어떻게 신을 증명할 수 있냐고 반문한다."라고 말이다.
네놈은 모순이 바로 그런 발악중의 한 정형이다. 네놈이 신의 존재를 해보라고 나에게 따지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식의 심리학으로 말하자면 "나는 믿음이 약합니다. 신이시여, 제가 이해가능하게 저의 인식이 와닿게 저에게 와 주십시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네놈은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믿고 싶어서 발악하는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에 불과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