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 내 형제는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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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가 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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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본래 3;21~22에 직결되는 것이었다.
21절은 개역개정에는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로 돼 있다.
공동번역에는 이 소식을 들은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그래서 그와 함께하는 자들은 그를 체포하려고 나섰다.
왜냐면 그들은 그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돼 있다.
이 그들은.......말하고 있었다. 에서 그들은 불특정 복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도 읽을 수도 있지만,
문맥으로 봐서 바로 전에 언급된 친족들이라고 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공동번역(새 번역)에서 보면 예수가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의 친척들이 아니다.
그러면 원 마가서의 친족이나 제자들에 대한 비판적 자세가 흐트러져 버린다.
공동번역(새 번역)의 역자들은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를 미쳤다고 말하는 것이 모양새가 안 좋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러한 번역은 마가의 비판적 시점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두 절은 마태서나 누가서의 같은 구절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예수의 친족들이 예수를 이런 식으로 취급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모양새가 안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위 구절 바로 앞 즉 21절 다음에는 유명한 바알세불 논쟁 기사가 있는데(22~30절),
거기에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서기관)들이 예수를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에게 힘입었다고 중상모략하고 있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31절은 본래 21절 다음에 와야 하는데, 마가는 21절과 31절 사이에 이 바알세불 논쟁을 삽입했다.
그것은 예수의 친족들이 예수를 미쳤다고 한 것과, 이 학자들이 예수를 귀신의 왕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중상한 것을
동렬에 놓고 강조하여, 양쪽을 함께 비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붙들다라는 말인데, 그것은 후에 예수의 적들이 예수를 체포하려고 왔을 때에도 사용되고 있는 말이다.<12;12, 14;1,44,46,49>
마가가 예수 친족들의 태도를 비판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히 나타나는 용법이다.
31절에서는 예수의 친족들이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로 번역돼 있는데,
여기에는 친족들의 냉정한 태도가 배어나오고 있다.
그들은 군중에게 다가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일부러 사람을 보내 부르고 있으며, 극히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32절에서는 친족들이 예수를 찾는다고 하는데, 이 찾는다는 말은 갈구하다는 의미로 거의 수색이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
예수는 마치 수배자(용의자)처럼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32절의 개역개정은 무리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 말은 그리스어의 OCHLOS(오크로스=민중)로 마가가 독특한 뉘앙스로 사용하고 있는 말이며,
군중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35절에서 예수는 선언한다. 원문은 “보라! 내 어머니, 내 형제” 로 간결하고 예리하다.
예수는 갈릴리의 가난한 군중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들-을 둘러보고 그렇게 선언한다.
35절은 본래 독립된 전승이었다. 보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해 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누구라 하더라도, 그 자야말로 나의 형제, 자매 또 어머니이다”가 된다.
마가는 이 전승을 이 부분에 연결해 놓음으로써 갈릴리의 가난한 민중=어머니, 형제, 자매=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라는 등식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서 보면 이것은 기묘한 등식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라고 강조하고 있으면서,
여기서의 군중은 예수 앞에 앉아 있을 뿐 아무것도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억압 받고 경멸당하는 상황 속에서 예수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가난하고 무력한 군중의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키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 마가적 시점을 다시 확실히 보기 위해 다른 복음서의 평행기사를 검토해 보자.
46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태 12;46~50>.
<12;46>에서 우선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말하려고 로 돼 있는데, 이 말하다는 말이 예수가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와 같은 동사이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민중에게 한다는 설교조의 말이 친족들의 경우에도 사용되고 있으며,
마가의 경우처럼 그들이 예수를 미친 사람으로 보고 체포하려는 것이 아니고, 계속 품격 높은 말이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가 미쳤다는 등의 전승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자세는 소위 예수에게 말씀드리고 싶다는 식의 접근이다.
마가서의 사람을 보내 불렀다는 냉정한 태도와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개역개정판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은 그런 관점에서 본 것이다.
마태서의 예수가 마가서의 경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49절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태도이다.
공동번역 판에는 제자들을 가리켜 로 번역되어 있는데, 원문을 직역해 보면 그의 제자들 위로 손을 앞으로 내밀어 이다.
새번역에는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서 말씀하셨다로 돼 있다. 이편이 훨씬 낫다.
이 손을 앞으로 내밀어라는 표현은 현대의 신부나 목사들이 손을 앞으로 내밀어 상대를 축복할 때에 하는 제스처로,
특별히 권위 있는 성직자가 축복을 줄 때에 보이는 종교적인 예전의식이다.
즉 여기서는 제자들을 종교적, 예전적으로 축복하고, 그들에게 권위를 주는 의례로 바뀌어 버렸다.
마가서와 달리 마태서에서 저 군중은 완전히 무시되고, 제자들이 축복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50절에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라는 식으로 장중한 종교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가의 시점과 차이가 명료하다.
이런 방향은 후에 성직자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고, 안수라는 특정의 종교적 의례에 의해 사도적 권위가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고 있다는 개념이 날조되기에 이른다.
마지막에는 로마 교황이 그 위치에서 한 말은 일절 잘못이 없다는 터무니없는 망상이 교황 무오설이라는 교의로
제정되게 되는 것이다. 무서울 정도의 변질이라 할 것이다.
누가서 같은 구절 <8;19~21>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여기서는 전체가 다음과 같이 실로 단순화되고 있다.
19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여기서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온 것은 보려고 로 돼 있다.
idein(이데인=본다는 뜻)이란 말은 상당히 정중한 경우에도 사용되는 말로, 마가서처럼 그들이 예수를 붙잡으러 왔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뉘앙스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라고 하는데,
마치 무리(군중)는 친족들에게 방해되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다시 마가서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 로 바뀌었다.
누가의 기사가 교의적 이해로 종교화 되는 것은 바로 다음 한걸음이라 할 수 있다.
이 방향은 바울의 경우에 더욱 철저해진다. 예를 들면 <로마 10;8~10>이다.
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렇게 해서 마가적 관점은 아주 신속하게 추상화, 종교화 되어간다.
이것이 절대화 됐을 때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되고,
결국에는 영원히 구원 받지 못하는 짐을 지는 죄라는 터무니 없는 개념이 생겨나는 것이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막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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