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해석의 달인 헛다리 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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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다리 개독님을 모십니다.ㅋㅋㅋ
은 그냥 말장난이고요.
우리 말 속담 중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위 속담은 적어도 돌다리를 이용해서 얕은 강을 건너던 옛날 시대에 전해진 것이라 추정되겠죠?
실제로 저는 돌다리를 건너보진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서울 한복판에 깔린
청계천 돌다리 비스무리한 걸 보기만 했습니다. 건너볼 마음도 없고요.
그런데,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나라는 속담은
오늘날에도 매우 많은 인간의 삶에 충고를 주는 보편적인 명언으로 정착했습니다.
아니?! 돌다리도 없는데 왜 이럴 수가 있을까요?
돌다리가 없어서 실제로 두드려보지도 못하는데 왜 돌다리에 관한 이 속담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 입에 올라갈까요?
인간은, 주어진 문장, 단어, 언어에 대해서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상상력과 비유/은유라고 하는 놀이를 할 수 있는 동물이거든요.
'인간은 놀이하는 동물이다 -호이징거'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라는 건, 진짜 실제로 돌다리 위에서 앞돌다리를 건널 때 두드려보라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 속담의 의미는 그만큼 신중하게 행동해라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ㅋ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알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라는 속담, 텍스트에서
신중하게 행동하라라는 의미를 찾아내는 힘. 그것이 상상력이고 비유법, 은유법등의 언어놀이에 의한
'의미부여'인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단어가 중첩되어 있지도 않은데도 인간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라는 문장에서 신중하게 행동하라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돌다리도 없는, 한번도 돌다리를 보지 않은 사람들 입에서도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속담이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속담 그 자체의 의도가 아닌 속담에 부여된 의미를 의도한 것이며 그 의미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 속담이 삶 속에 스며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성급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이죠.
디테일하게 들여다보면
만약 제가 값비싼 사치품, 예를 들어 100만원짜리 핸드폰에 눈이 꽂혀 살려고 할때
옆 사람이 주의를 주면서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라는 속담을 말하는 데에는
그 고가의 핸드폰이 너에게 꼭 필요하느냐 다시 생각해보라는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다른 예로는 제가 무대포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음식가게를 하려고 할떄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속담을 말해주는 사람은 이러저러한 자본적인 시점을 다시 한번 잘 따져보고
회사를 그만두고 음식가계를 열어라고 하는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자간의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일임에도 통할 수 있죠.
도대체 100만원짜리 핸드폰이랑 돌다리랑 무슨 상관이죠? 어떤 연관성이 있죠?
음식가계와 돌다리는 또 무슨 연관성이 있죠?
아무런 영향도 없습니다. 일체 연관성이 없죠.
그러나 인간은, 의미부여 속에서 서로 다른 아무 연관 없는 사건을 이어붙일 수 있습니다.
바이블을 인용해서 오늘날 삶의 이러저러한 문제나 미래를 예지하려는 행동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바이블이 쓰여질 시대상과 오늘의 시대는 고민의 질이 확연히 다르거든요.
반세기의 나이차이가 나도 시대차이가 확연히 들어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데
히믈먀 2천년 전에 쓰여진 바이블과 오늘 현시대의 차이는 상당한 괴리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바이블에 적혀있는 문장 문장들이
오늘날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를 다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책 속에서 인생의 해답이 보인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정말인가요? 정말 그럴까요?
바이블이 그러한 해답을 주는 게 아니고
텍스트, 문장을 읽는 당신이 그 바이블 속의 문장에 의미를 부여해서 읽어온 게 아닐까요?
즉, 바이블을 해석하는 당신이 색안경을 끼고
바이블을 읽는게 아닐까요? 그래서 오늘날 직면한 문제의 해답을 찾아낸 건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색안경은 무슨 색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게 아닐까요?
은 그냥 말장난이고요.
우리 말 속담 중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위 속담은 적어도 돌다리를 이용해서 얕은 강을 건너던 옛날 시대에 전해진 것이라 추정되겠죠?
실제로 저는 돌다리를 건너보진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서울 한복판에 깔린
청계천 돌다리 비스무리한 걸 보기만 했습니다. 건너볼 마음도 없고요.
그런데,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나라는 속담은
오늘날에도 매우 많은 인간의 삶에 충고를 주는 보편적인 명언으로 정착했습니다.
아니?! 돌다리도 없는데 왜 이럴 수가 있을까요?
돌다리가 없어서 실제로 두드려보지도 못하는데 왜 돌다리에 관한 이 속담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 입에 올라갈까요?
인간은, 주어진 문장, 단어, 언어에 대해서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상상력과 비유/은유라고 하는 놀이를 할 수 있는 동물이거든요.
'인간은 놀이하는 동물이다 -호이징거'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라는 건, 진짜 실제로 돌다리 위에서 앞돌다리를 건널 때 두드려보라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 속담의 의미는 그만큼 신중하게 행동해라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ㅋ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알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라는 속담, 텍스트에서
신중하게 행동하라라는 의미를 찾아내는 힘. 그것이 상상력이고 비유법, 은유법등의 언어놀이에 의한
'의미부여'인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단어가 중첩되어 있지도 않은데도 인간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라는 문장에서 신중하게 행동하라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돌다리도 없는, 한번도 돌다리를 보지 않은 사람들 입에서도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속담이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속담 그 자체의 의도가 아닌 속담에 부여된 의미를 의도한 것이며 그 의미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 속담이 삶 속에 스며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성급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이죠.
디테일하게 들여다보면
만약 제가 값비싼 사치품, 예를 들어 100만원짜리 핸드폰에 눈이 꽂혀 살려고 할때
옆 사람이 주의를 주면서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라는 속담을 말하는 데에는
그 고가의 핸드폰이 너에게 꼭 필요하느냐 다시 생각해보라는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다른 예로는 제가 무대포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음식가게를 하려고 할떄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속담을 말해주는 사람은 이러저러한 자본적인 시점을 다시 한번 잘 따져보고
회사를 그만두고 음식가계를 열어라고 하는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자간의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일임에도 통할 수 있죠.
도대체 100만원짜리 핸드폰이랑 돌다리랑 무슨 상관이죠? 어떤 연관성이 있죠?
음식가계와 돌다리는 또 무슨 연관성이 있죠?
아무런 영향도 없습니다. 일체 연관성이 없죠.
그러나 인간은, 의미부여 속에서 서로 다른 아무 연관 없는 사건을 이어붙일 수 있습니다.
바이블을 인용해서 오늘날 삶의 이러저러한 문제나 미래를 예지하려는 행동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바이블이 쓰여질 시대상과 오늘의 시대는 고민의 질이 확연히 다르거든요.
반세기의 나이차이가 나도 시대차이가 확연히 들어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데
히믈먀 2천년 전에 쓰여진 바이블과 오늘 현시대의 차이는 상당한 괴리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바이블에 적혀있는 문장 문장들이
오늘날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를 다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책 속에서 인생의 해답이 보인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정말인가요? 정말 그럴까요?
바이블이 그러한 해답을 주는 게 아니고
텍스트, 문장을 읽는 당신이 그 바이블 속의 문장에 의미를 부여해서 읽어온 게 아닐까요?
즉, 바이블을 해석하는 당신이 색안경을 끼고
바이블을 읽는게 아닐까요? 그래서 오늘날 직면한 문제의 해답을 찾아낸 건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색안경은 무슨 색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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